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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라는 욕망의 전차는

멈춘 적이 없다.
The streetcar of desire named theatre has never stopped.

 

성지수 Sung Jisu

(콜렉티브 뒹굴 대표, 연출가 Director of Collective Doingle)
facebook.com/DoingleAround  @doingle_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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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계 미투 고발이 이어졌을 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었다. ‘쇼 머스트 고 온!’ ‘그래도 공연은 올라간다!’와 같은 오래된 말들이, 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는 데 크게 한 몫 했다는 말에 말이다.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열정(이라는 말로 가려지던 폭력과 착취의 구조)’이 연극 산업을 지탱하는 거의 전부였던 시대가 이제는 막을 내려야 한다고, 관객들도 그렇게 ‘사람을 갈아 넣어’ 만든 작품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럼 이제 관객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어떤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가?
 

 객은 배우, 무대와 함께 공연예술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3요소로 꼽힌다. 봐 주는 사람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예술, ‘지금, 여기’에서 창작자와 시공간을 공유하며 작품을 향유해줄 수용자가 절실한 매체가 공연예술이기 때문이다. 현장성이라는 멋진 말로도 서술되곤 하는 이 공연예술의 특성은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관계성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은 남지만, 공연예술은 그렇지 않다. 설사 공연 실황 영상이나 사진이 남는다고 해도 그것은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 작품의 부산물에 가깝다. 공연예술을 창작하는 공간에서는, 관객의 존재는 늘 작품의 성패뿐 아니라 성립 여부까지 좌우하는 절대적인 존재라 일컬어져 왔다.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실제 공연예술의 창작 과정 및 수용 과정에서 관객은 그런 존재로서의 입지를 누려왔던가? 적어도 연극에 대해선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 고 말할 수 있다. 연극에서 관객은 동원의 대상일 뿐이었다. 내가 관객으로서 느끼는 연극 창작자들의 이미지는 이러한 것이다. 사회 그 어느 분야에서도 쓸모없을 정도의 재능과 물자를 가진 주제에 악을 써 가며 나의 예술적 열정을 보라고 떼를 쓰는 이른바 찌질이 그룹. 나는 이를 입증하는 농담 아닌 농담도 알고 있다. “연극 극장에는 네 종류의 관객이 95% 이상인데, 이는 동료 연극인, 지인, 혹은 연극인인 지인, 지인인 연극인이다.” 서로의 작업을 지탱해주기 위해 ‘구린’ 작품을 보는 괴로움을 무릅쓰고 오늘도 극장을 찾는, 안쓰러운 자들. 그 안에서 서로의 장점과 의의를 착즙하듯 발견해주고 이를 통해 서로의 권위를 만들어주기. 돈도 안 되는 소위 ‘아트’를 ‘열정’만으로 이어가고 있는 이곳에서, 서로가 서로의 논리이자 힘이 되어주던 여기에서 관객은 점차 연극을 볼 이유를 잃고 떠났다. 무대 위에는 남겨진 자들의 자(기)위(로)가 채워진다. 이러한 현장에서 폭력과 착취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며, 이들의 창작물이 공연이라기보다 공연음란행위에 가까운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라고 망언을 던져본다).
 

 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관객 미투 집회는 연극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이었으며, 창작자들의 발상이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드디어) 느낀 계기가 되었다. 성범죄자의 공연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재미있는 작품이기 이전에 올바른 과정을 거쳐 창작된 작품을 보고 싶다고 선언한 관객들의 연대 집회는 특히 젊은 연극 창작자들을 각성시켰다. 그러나 연극계에는 이 변화를 위한 언어가 전혀 없었다. 연극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겨우 이들의 존재를 새롭게 인지한 것 정도였다. 필연적으로, 그나마 인지 능력이란 걸 잃지 않은 연극인들은 창작 작업을 잠시 멈춰야 하는 것 아닌지를 놓고 고민하기도 했다. 기존의 창작 방법론이 무의미하다고 거리로 나온 수용자들이 외쳤으니까.
 

 러나 현재로서는 그 각성했다는 젊은 창작자들의 작품들이 관객과의 소통 방식에 대한 고민보다는 소재주의에 치우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을 굳이 연극으로 재생산하면서 이를 자기 작품의 정당성으로 삼는 작업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 것 같다. (창작자들의 의도가 불순했다기보다 그것과
상관없이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이 모양 이 꼴’일 때의 민망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자면 관객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선전하려드는, 관객보다 멍청한 작업자들의 연극! 엘리트도 아니면서 엘리트주의자들인 작업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특한 마음으로 극장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는 페미니스트 관객들. 그 사이에 발생하는 그런 민망함 말이다. 어떤 창작자가 어떤 소재를 공부했다면, 그 소재를 연극이라는 방법론으로 새롭게 감각했다면, 그것을 관객들에게는 어떤 차원까지 어느 방법론으로 감각시켜줄 것인가를 제발 고민해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관객인 내가 니 연극을 봐야 할 이유를 만들어달란 말이다. 시간 돈 에너지 쓰고 그 후진 극장까지 가서!

 

 래서 이 시점에서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런 쇼라면 멈춰야 한다고 말하던, 잠깐이라도 작업을 멈추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하던 이들 중 누가 정말 작품 만들기를 그만 두었던가? 기존 연극계에 창작 언어가 부족함을 깨달았던 사람들 중에 다른 방식의 창작, 다른 방식의 관객과의 관계 맺기를 고민하는 작업자가 있긴 했던가? 그런 시도들이 관객의 눈에 포착되었는가? 그런 시도를 하는 작업자들에게 연극계는 관심을 기울였는가? 어느 질문에도 시원스레 긍정적 답변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연극계 미투 이후의 한국 연극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다들 그저 나는 그 성범죄자들 같은 괴물은 아니라는 선언을 하루 빨리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한국 연극이 이전의 사회적 참사를 자신의 소재로 전락시켰던 것처럼, 미투나 페미니즘도 그런 방식으로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관객이 창작 과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상연 이후 과정에서 의견 제시하기를 원하며 ‘존재감을 뿜뿜’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연극 창작 방법론이나 수용자와의 관계 맺는 방식에 균열을 냈음에도, 이 빌어먹을 ‘한국 연극’은 별다른 멈춤이나 방향 틀기 없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연극이 대중 예술이 아닌지는 꽤 오래 되었으니 이제라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무언가를 선전하기에 연극은 그리 적합한 예술 매체가 아니라는 점을. 무언가 관객에게 가르치려는 시도도 그만두어야 한다. 대부분의 연극 창작자들보다 동시대 수용자들의 지식수준과 경험의 폭이 훨씬 높고 넓기 때문에. 왜 지금 이 얘기를 굳이 연극으로까지 해야 하는지 창작자들은 각 작업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훨씬 덜 들이면서 편안한 환경에서 접할 수 있는 많은 예술 매체가 일상 안으로 들어왔으므로. 그리고 다시금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연극의 고유한 매체성은 이런 거야.’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것을 동시대 관객들이 허락해 준 적 있냐고. 그렇지 않은 작업이라면 그것은 쓰레기다. 아무리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다루더라도. 아무리 겉보기에 폼이 나더라도. 그리고 쓰레기 생산은 생태계를 위해 반드시 멈춰야 한다.
 

 렇게 말하는 너는, 작업을 멈추었냐? 아니, 그렇지 않다. 콜렉티브 뒹굴은 2018년 한 해 동안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작업을 해 댔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점이라면 우리가 ‘작품 만들기’만큼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는 점일 테다. 뒹굴은 미투 이후 작품을 한 적이 없다. 작업 과정을 어떻게 하면 더 평등하게 할 것인가, 작업 과정에서의 평등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험하는 한편, 이 결과물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자와 공유할 것인가를 큰 방향성으로 두었다. 창작 방법론 찾기, 그리고 수용자와의 새로운 관계성 형성하기와 이를 위한 새로운 판 디자인에 매진하고 있는 셈이다. 콜렉티브 뒹굴의 관객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가 관객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과 우리는 창작물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나 공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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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en the Me Too movement hit the theatre scene, everyone nodded. We all agreed that antiquated slogans such as “The show must go on!” were some of the many elements that led to this disaster. There was a time when an auteur’s passion (or the violence and exploitation veiled behind the word) was almost the only thing that held the industry together. We believed this time must end for good. It seemed certain that audiences would also not want to see a work that exploited so many people. But this led to yet more questions: what do people want to see now? What kind of plays should we make?


 The audience is one of the three major components of a play, along with the actors and the stage. Performing arts cannot exist without an audience; it is crucial to have an audience who share the same time and space with the creators and performers. This characteristic of theatre, which is often referred to as “presentness”, can be identified as the relationship itself between the creators and consumers of art. Writings, paintings, photography, and film can persist forever, so they can be experienced long after the creator has passed away. This is not the case for performing arts. Even if a recording of the event is made, it is more a by-product of the work than the work itself. Wherever a performance is created, whether it’s a stage, an art college classroom, or a theatre club, the presence
of the audience is considered absolutely essential not only for the success of the work, but for its very existence ― at least theoretically.

 

 However, has the audience generally been attributed such importance? I can say with some confidence that it has not. In fact, speaking of plays, the audience does not seem to matter at all. They are mere spectators of the creative work, and nothing more. As a regular audience member myself, I have often felt how little I am appreciated as a participant of a play. At the same time, I’ve often found myself dismissing creators of theatre as obnoxious and impotent, unable to contribute anything real to society, but who for some reason just cannot stop forcing other people to observe their artistic pretensions. There is a joke that follows: “There are four groups that constitute over 95 percent of an audience: fellow performers, performers’ friends, performers’ friends who are also performers themselves, or other performers who happen to be the performers’ friends.” This vicious circle of performer-audiences who tolerate terrible works just to support each other keeps turning to infinity. Inside that circle, we receive praise and justification, buttressing each other’s dignity. This ‘cartel of silence’ sustains the Deahak-ro: the major theatre scene in Seoul. The choice was clear ― accept things as they are, or leave the theatre scene for good. When the scene is sustained by spurious ‘passion’ for so-called ‘art’, when the performers themselves create their own purpose, then the audience has lost any reason to show up, and is gone. On stage, there remains the self-consolation (or masturbation) of the people who are left behind. It would be strange if violence and exploitation had not occurred in such an environment.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work produced is more indecent exposure than art.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continuous Me Too rallies shocked those who remained in the scene, and they finally understood the need for change. The solidarity rallies formed by would-be audiences refusing to see another work by a sex criminal, demanding ‘responsible plays’ before ‘good plays’, were a wake-up call to the creators of theatre, especially the younger generation. Something had to change, and they all understood that without that change, theatre would be just another ‘monster’ sustaining the ‘cartel of silence.’ But the theatre scene lacked the language to make this happen. The audience demanded change, but at a time when the people of the theatre scene had barely begun to notice the existence of an audience: ‘Yes, we have an audience, and they are demanding that we change.’ Inevitably, those who at least had not entirely lost the ability to reason were thinking whether they should continue to create at all, since the audience on the street were shouting that the preexisting method of creating a play and the standards that defined its value had lost all meaning.
 

 For now, works by the ‘awakened' young creators seem to just be focused on finding new material, rather than interacting with the audience. It seems like many plays are just reproducing easily-attained knowledge and ideas that are not really worth being made into a play. I am not accusing the creators of nefarious purpose, but rather that the results have been embarrassing. It is absurd to watch an elitist play that tries to enlighten the audience with feminism, while it is actually the audience that has a deeper understanding of feminism than the creator. If a playwright or a director studies a certain topic, and transforms that
material using the methods of theatre, then they must consider to what extent and in what ways the play will affect the intended audience. It would be nice to have an actual reason for me to watch your play, after spending my precious time, money, and energy in this shitty theatre.

 

 I’d like to ask some more questions. There were some who argued that we should stop making shows, and take some time for introspection. But did they really stop producing? Was there anyone who realized that the theatrical world lacks a creative language, and attempted different methods of creation and interaction with the audience? Did audiences sense these attempts? Is the theatrical world paying any attention to those creators who try something new? I judge that no one can clearly answer these questions after Me Too in the Korean theatrical world. Perhaps everyone wanted to declare, “I’m not a monster like those sex offenders”, as quickly as they could. When it comes to social issues of the past, the Korean theatrical world merely objectified them, and I’m worried that Me Too and feminism are also being taken advantage of. Audiences have cracked open a fissure in the current creation process, and called into question the relation between creator and audience, demonstrating their very existence by critiquing the production process and demanding their opinions be heard. But Korean theatre trundles along without pause, never changing direction.
 

 It has been a while since theatre ceased to be a public art, and we must recognize that theatre is no longer a proper artistic medium for propagation. We should stop trying to teach something to audiences, because today’s audiences have deeper knowledge and wider experience than most creators do. Creators should be able to answer why they stick obstinately to mere dramatization. There is plenty of artistic media in everyday life which does not demand much time, money or energy and is accessible in a comfortable environment. We should ask ourselves if today’s audiences have ever accepted the argument that the negative points mentioned “are essential characteristics of theatre.” If not, then even if a work covers an important social issue, or is a polished performance, then it is trash. We should stop polluting.
 

 So, did I stop my work? No, I didn’t. Collective Doingle did not stop working in 2018. On the contrary, we worked continuously. However, it is true that we temporarily stopped “producing works.” After Me Too, Collective Doingle didn’t produce anything. Rather, we tried to clarify what equality means in the context of theatre, and develop an equal production process. Also, we considered how to share these outcomes with audiences. Our focus is to find new methods of creation, to develop new forms of relations with the audience. We hope to achieve both of these goals. Who are the audiences of Collective Doingle? What do they want from us? What do we want from them? How much responsibility can we and they 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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